[발제문] 사부대중공동체 정립 과제와 총무원장 직선제 / 박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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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25.06.13 조회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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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제문은 2017년 2월 28일, 서울 시민청 지하2층 태평홀에서 직선제 실현을 위한 대중공사가 주최한 “조계종 총무원장 직선제 실현을 위한 공청회”에서 박병기교수가 발표한 자료입니다.
사부대중공동체 정립 과제와 총무원장 직선제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1. 우리 현실에 대한 사회윤리적 성찰: 윤리 귀환 시대
우리 현실이 엄중하다. 이른바 국정농단 세력과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행태라는 외적인 모습에서 그 엄중함이 먼저 부각되어 있지만, 사실 더 심각한 것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치관의 왜곡과 무도덕화 현상의 만연이다.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법적으로만 문제되지 않으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반복하는 이 땅 ‘엘리트’들의 후안무치함과,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아이들은 그래도 저렇게 좋은 대학을 나와 높은 자리에 오르고 할 수만 있으면 많은 돈도 벌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내면의 이중성이 문제의 핵심이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외국 여행이 일상 속으로 들어온 21세기 초반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다른 나라와의 터무니없는 비교의 오류를 떨쳐버릴 수 있는 여건을 어느 정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트럼프 같은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미국을 여전히 ‘최고의 민주국가’이자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우리의 교육과 의료체제를 지속적으로 부러워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그 외부의 시선이 지니는 근원적인 한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게 되었다. 파리지앵이나 런더너로 상징되는 유럽인들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해 여름 한 달 정도 프랑스 파리와 독일 뮌헨,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를 돌아보는 여행 내내 우리 가족을 따라다닌 것은 소매치기와 도둑에 대한 경계심과 테러에 대한 공포였다. 치안이 비교적 좋은 편이라는 독일 뉘른베르크 커피점에서는 화장실에 갈 때도 노트북을 꼭 챙겨서 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고,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서는 중무장한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하릴없이 배회하는 소매치기 같은 느낌의 동유럽 출신 청소년들의 휘황한 눈빛과 마주해야 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상당히 좋은 치안과 도덕 수준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밤늦게 큰 두려움 없이 거리를 나다닐 수 있고,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은행에 다녀오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커피점에 노트북을 놓아두어도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다.
국가 단위로 도덕성 수준을 비교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다. 그나마 우리처럼 민족과 국가가 상당 부분 겹치는 경우에는 문화유전자 차원에서 제한적인 비교가 불가능하지 않지만, 근대 이후 국민국가 형태로 출범한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 경우에는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한 나라에 대해 평가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어떤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을 때라도 그것과 상반되는 다른 경험적인 근거와 마주할 수 있는 반증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런 전제 속에서 현재의 우리 사회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본다면, 공정성과 정의로 상징되는 사회윤리의 훼손과 정직과 신뢰로 상징되는 개인윤리의 무시 또는 경시로 요약될 수 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시기에 ‘도덕’이라는 과목을 통해 우리 시대와 전통의 도덕과 윤리를 배우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한편으로, 시험으로 상징되는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좋은 성적을 거두고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만 하면 도덕성은 무시해도 된다는 강력한 가르침을 받는다. 그 중에서 힘이 더 센 것은 당연히 후자고, 우리가 요즘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서 고통스럽게 지켜 보야야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바로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해낸 ‘잘 난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도덕국가의 지향을 지니고 있던 조선의 도덕적 이중성 문화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이미 조선 후기에 연암 박지원의 ‘호질문’ 등을 통해 적시된 것처럼, 조선 이후 도덕은 외형적인 강조와 극단화, 실질적인 무시라는 이중성을 강화한 채 우리에게 전해진다. 불행히도 그 전승은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권의 지배와 억압 수단으로 소환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극복과 떨침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압축성장의 신화와 저항적 민주화 과정과 맞물리면서 현재와 같은 무도덕의 사회로 자리잡았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더 이상 이런 상황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고립된 이기성을 전제로 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지향은 우리 삶이 깊은 연기성(緣起性) 속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는 불교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로 인해 지속 불가능하다. 그것이 사회적인 차원으로 전개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적극적이고 악의적으로 이용하여 이득만은 추구하는 자들이 국가까지도 장악해버리는 현재와 같은 국면으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최순실·박근혜 사태‘는 우리가 자초한 것이고, 그들의 얼굴은 우리의 자화상인 셈이다. 일제 강점기를 합리화하던 식민지 노예도덕과 군부독재 정권의 부정의를 정당화하던 국민윤리의 질곡(桎梏)을 동시에 뛰어넘는 진정한 ’윤리 귀환 시대‘를 맞고 있다.
문제는 누가 이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실천의 과제이다. 부모나 교사(특히 도덕교사), 사회의 어른들일까, 아니면 종교지도자일까? 그 중 어느 누구도 쉽게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생존의 최소단위로 전락한 가정에서 부모가 그런 역할을 감당해 내기가 벅차고, 학교 도덕교사들 또한 입시위주의 학교 분위기 속에서 변두리로 밀린 지 오래다. 이 사회에 진정한 어른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고, 종교지도자 또한 아이들의 냉정한 평가와 시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과제를 포기할 수 없고, 그 남은 희망의 하나로 사부대중공동체로서 온전한 불교공동체의 회복을 중심으로 삼는 시민사회의 윤리적 기반 구축을 떠올릴 수 있다.
2. 우리 시민사회에서 종교의 역할과 불교의 위상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에 대한 평가는 외형적인 정착과 내면적인 균열로 요약될 수 있다.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형성된 시민사회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외형적으로 굳건한 토대를 갖추었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그 중 일부가 정권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 정치경제적 성과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여성이나 장애인, 성소수자 같은 소외세력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높아졌고 경제적 빈곤층을 포용하는 복지 정책 중 일부가 성공을 거두는 등 최소한 외적으로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정도다.
그러나 6월 항쟁 이후 10년 만에 구제금융사태라는 복병과 만나면서 그 외형마저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고, 더 중요한 시민윤리 정립 같은 내면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근대 이후 한 사회의 시민윤리는 민주공화(民主共和)의 이념과 시장을 아우르면서 각자의 시민이 자신의 삶의 의미 물음을 간직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 목표 달성을 위해 공교육 체제 안에 자신들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관련 과목을 만들고자 했고, 대표적인 과목이 영국의 종교, 프랑스의 철학, 독일의 종교 또는 윤리, 미국의 사회과(social studies) 등이다. 우리는 그것을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의 과목으로 시도했지만, 앞선 분석과 같이 권력의 부당한 개입으로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혐오와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전통사회에서 교육, 특히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에 대한 교육을 담당해온 것은 대체로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된, 소수를 위한 학교였다. 우리의 경우 강원과 같은 승려교육 기관과 성균관과 서원으로 상징되는 유교교육 기관이 있었고, 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삼은 서양의 경우는 대체로 수도원 같은 사제 양성 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근대 이후 세속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모든 시민을 교육 대상으로 삼는 공교육 체제가 확립되었고, 이제 학교는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민으로서의 시민을 양성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니게 된다. 우리의 경우는 대한제국 시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소학교와 그 학교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학교가 그 출발점을 이룬다.
이 과정 속에서 종교와 시민사회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과 만나게 되고, 그것은 대체로 공교육 체제 안에서 종교적 중립과 개인의 자유라는 헌법적 선언을 통해 종교 문제를 사적 영역의 자유와 권리문제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착하게 된다. 우리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 공교육 체제 안에 사립학교라는 이름으로 종교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사실이다. 특히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하는 그리스도교의 참여가 두드러져 21세기 초반 현재까지도 중등학교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전 국민의 40% 이상이 특정 종교를 갖고 있다고 답변하는 우리 현실 속에서 종교는 시민사회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이 물음에 관한 답은 우선 시민사회와 종교 각각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관한 현상 분석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각 시민이 갖고 있는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민사회의 통합과 분열, 공존 등의 지점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역으로 개별 시민이 갖고 있는 특정 종교가 시민사회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1)
시민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윤리는 공존의 윤리를 바탕으로 한 공정성으로서 정의(正義)의 윤리로 요약될 수 있다. 나와 다른 삶의 지향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대상임을 받아들이면서 감정적인 기복을 견뎌내는 것이 공존의 윤리다. 이것이 프랑스에서는 똘레랑스로 강조되었고 미국에서는 다문화에 대한 배려의 윤리로 강조되었지만, 불행히도 두 나라 모두에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공정성으로서 정의(justice) 윤리는 경쟁과 분배 과정에서 꼭 지켜져야만 하는 시민사회의 최소윤리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 즉 민주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희소한 가치를 향하는 경쟁은 불가피할 수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정의의 윤리가 작동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 사람은 승복할 수 없고, 이긴 사람도 성취의 도덕적 기반을 상실하면서 ‘부모의 돈과 권력도 정의’라는 식의 궤변으로 무장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게 된다.
이처럼 시민윤리는 게임의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공존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윤리는 말 그대로 시민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최소윤리일 뿐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관련되는 삶의 의미 물음으로서의 윤리와 철학은 각 시민의 몫으로 돌려지는 최대도덕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시민사회에서 주로 이 최대도덕의 영역을 감당하는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경쟁과 최소한의 공존관계로 인해 피폐해져가는 각 시민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안심(安心)을 근간으로,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지를 주기적으로 물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방법을 제공해주는 입명(立命)이 서로 이어져 있는 종교의 기능이자 역할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종교의 현실적 위상을 말해주는 조사연구 결과 2개가 발표되었다. 하나는 통계청이 10년 주기로 발표하는 종교인구 통계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미디어 이용 조사 연구에 포함된 종교인에 대한 신뢰도 조사이다. 앞의 것은 2005년에 비해 종교인구가 10% 가까이 줄었는데 그 대부분을 불교가 차지했다는 결과가 핵심이고, 뒤의 것은 10대 청소년들이 종교인을 정치인과 비슷한 정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충격적이다.2)
특히 4학년 이상 초등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결과에서는 정치인에도 밀려 종교인데 대한 신뢰도는 꼴찌에 머물고 있다.3)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관한 보다 적극적인 논의와 대응책 마련이 절실함에도 불교계 인터넷 매체 한 곳에서 다룬 것 말고는 다른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뿐이다
청소년들이 종교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각 종교를 이끌어가고 있는 승려와 목사, 신부 등이다. 그들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는 것은 각각이 대표하고 있는 제도종교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하고, 특히 그 중에서도 다시 순위를 매기면 대체로 개신교 목사 다음으로 승려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 법정, 성철스님 같은 불교지도자에 대한 인지도가 낮지 않았음에도 최근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을 대체할 만한 불교계 지도자가 없거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3. 한국불교의 신뢰 회복 과제와 총무원장 직선제
한 인간 또는 집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이유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다층적인 것일 수 있고, 따라서 그 현상에 대한 분석 또한 다양하고 다층적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발제자는 윤리 전공자이자 도덕교육 담당자라는 자신의 학문적·실천적 정체성을 전제로 분석하고 그에 따른 대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